[제9편] 베어링스 은행의 몰락: 28세 딜러 한 명이 200년 역사를 끝낸 전말

 영국 여왕의 개인 계좌를 관리하고, 과거 나폴레옹 전쟁 자금 조달은 물론 미국의 루이지애나 매입 자금까지 대출해 주었던 230년 전통의 명문 투자은행 '베어링스 은행(Barings Bank)'.

영국 왕실과 귀족들의 절대적인 신뢰를 받으며 세계 금융사를 호령하던 이 거대한 은행이 1995년 단 돈 1파운드(약 1,800원)에 네덜란드 ING 그룹으로 넘어가는 충격적인 사건이 벌어집니다.

내가 주식 및 금융 시장의 리스크 관리 역사를 탐구하면서 가장 기이하게 느꼈던 점은, 거대한 은행을 무너뜨린 것이 외계인의 침공이나 국가 간 대규모 전쟁이 아니라 ‘28세 청년 딜러 한 명의 거짓말과 통제되지 않은 시스템’이었다는 사실입니다. 금융 역사상 가장 유명한 '거로그 딜러(Rogue Trader)' 니콜라스 리슨(Nick Leeson)의 파국 스토리를 소개합니다.

[싱가포르의 스타 딜러, 비밀 계좌 88888를 만들다]

1992년, 당시 25세였던 닉 리슨은 베어링스 은행의 싱가포르 지사(SIMEX) 선물거래 책임자로 발령받았습니다. 그는 일본 니케이 225 지수 선물과 일본 국채를 이용해 차익거래(Arbitrage)를 담당하는 딜러였습니다.

처음 그는 회사에 막대한 수익을 안겨주며 싱가포르 지사 전체 이익의 80% 이상을 혼자 벌어다 주는 '스타 딜러'로 떠올랐습니다. 런던 본사는 그를 절대적으로 신뢰했고, 수억 원의 보너스를 지급하며 그가 원하는 대로 거래할 수 있도록 방치했습니다.

하지만 치명적인 문제는 조직의 시스템에 있었습니다. 리슨은 싱가포르 지사에서 '거래를 실행하는 딜러(Front Office)' 역할과, '그 거래를 검증하고 정산하는 백오피스(Back Office) 관리자' 역할을 동시에 겸임하고 있었습니다. 손실이 나더라도 본인이 마음만 먹으면 은폐할 수 있는 무소불위의 권한을 쥐게 된 것입니다.

어느 날 신입 직원의 실수로 소액의 손실이 발생하자, 리슨은 이를 본사에 보고하는 대신 비밀 계좌 하나를 개설해 손실을 감추었습니다. 그 계좌 번호가 바로 금융 역사에 악명을 남긴 '88888 계좌'였습니다.

[도박꾼의 오류: 손실을 메우기 위해 배로 지르는 물타기]

비밀 계좌에 손실을 숨긴 리슨은 원래대로라면 거래 승인을 받을 수 없는 위험한 방향성 투자를 감행하기 시작했습니다. 손실을 메우기 위해 더 큰 위험을 지는 '물타기' 거래를 반복한 것입니다.

1994년 말이 되자, 비밀 계좌 88888에 누적된 손실은 이미 2억 파운드(약 3,500억 원)를 넘어섰습니다. 당시 베어링스 은행의 전체 자본금의 절반에 육박하는 거액이었습니다. 정상적인 시스템이었다면 당장 거래가 중단되고 감사가 들어왔어야 했지만, 리슨은 허위 서류를 제출하여 런던 본사로부터 "거래 증거금이 필요하다"며 추가 자금을 계속 송금받아 연명했습니다.

리슨은 마지막 한 판으로 모든 손실을 복구하고 영웅이 될 과감한 한 수를 두기로 결심합니다.

"일본 경제는 튼튼하니까 니케이 지수는 절대 19,000포인트 밑으로 떨어지지 않을 것이다."

그는 니케이 225 지수가 일정 범위 안에서 유지될 것이라는 데 거대한 규모의 레버리지 선물 및 옵션 포지션을 구축했습니다.

[1995년 1월 고베 대지진, 그리고 허망한 결말]

그러나 1995년 1월 17일 새벽, 리슨의 모든 계산을 산산조각 내는 예측 불가능한 자연재해가 찾아옵니다. 바로 일본 고베 대지진이 발생한 것입니다.

지진 여파로 일본 경제에 대한 공포가 확산하면서 니케이 지수는 폭락하기 시작했습니다. 일반적인 딜러라면 이 시점에서 손절매(Stop-loss)를 하고 탈출했겠지만, 이미 돌아올 수 없는 강을 건넌 리슨은 완전히 이성을 잃었습니다. 지수를 인위적으로 떠받치기 위해 본사의 자금을 모조리 끌어와 니케이 선물 매수 물량을 미친 듯이 사들였습니다.

하지만 시장의 거대한 흐름을 단 한 명의 투기꾼이 막아설 수는 없었습니다. 니케이 지수는 계속해서 수직 하락했고, 리슨의 손실은 걷잡을 수 없이 불어났습니다.

1995년 2월 23일, 도저히 손실을 감당할 수 없게 된 리슨은 메모 한 장을 남긴 채 싱가포르에서 도망쳤습니다.

"미안합니다 (I'm Sorry)"

그가 남기고 간 비밀 계좌의 최종 손실액은 8억 2,700만 파운드(약 1조 4,000억 원)였습니다. 이는 당시 베어링스 은행이 보유한 전체 자산과 납입 자본금을 모두 합친 것보다 큰 금액이었습니다. 230년 역사의 영국 명문 은행이 불과 28세 딜러 한 명의 무모한 빚투로 인해 단 하룻밤 만에 지급불능(파산) 상태에 빠진 것입니다.

영국 중앙은행이 긴급 구제금융을 모색했으나 손실 규모가 너무 커 포기했고, 결국 베어링스 은행은 단 돈 1파운드에 네덜란드 ING 그룹으로 매각되며 역사 속으로 사라졌습니다.

[베어링스 파산 사건이 금융가에 남긴 교훈]

베어링스 은행의 몰락은 현대 금융시장에서 ' 내부 통제(Internal Control)'와 '리스크 관리'의 중요성을 각인시킨 대표적인 반면교사 사례로 꼽힙니다.

  1. 견제와 균형의 부재: 거래를 일으키는 주체(딜러)와 이를 감시하는 주체(정산 담당)를 한 사람에게 맡기는 순간, 아무리 정교한 조직이라도 내부 비리에 무너질 수밖에 없습니다.

  2. 손실 회피 심리(Loss Aversion): 인간은 이익을 볼 때는 안전을 추구하지만, 손실을 보게 되면 원래 위험 성향보다 훨씬 더 비이성적인 위험(물타기, 몰빵)을 감수하려는 심리가 있습니다.

기술이 발전하고 AI와 시스템 매매가 대세가 된 오늘날에도, 결국 시스템을 운영하는 인간의 이기심과 무모함을 통제하지 못한다면 아무리 거대한 금융기관이라도 순식간에 무너질 수 있다는 진리를 베어링스 사건은 여전히 경고하고 있습니다.

핵심 요약

  1. 230년 역사의 영국 명문 베어링스 은행은 28세 싱가포르 지사 딜러 '닉 리슨'의 은폐된 선물 거래 손실로 인해 파산했습니다.

  2. 리슨은 딜러와 백오피스 정산 관리자 직무를 동시 수행하는 허점을 이용해 '88888 비밀 계좌'에 손실을 숨기고 과도한 물타기를 감행했습니다.

  3. 1995년 고베 대지진으로 인한 니케이 지수 폭락으로 1조 4,000억 원의 손실이 터졌고, 베어링스 은행은 단 1파운드에 매각되었습니다.

다음 편 예고

다음 글에서는 일본 버블 경제의 피크와 붕괴 과정을 다루는 ‘도쿄 증권거래소의 잃어버린 30년: 버블 경제 피크 시절의 기이한 풍경들’을 다룹니다.

함께 생각해볼 댓글 질문

투자하다 손실이 났을 때 자존심이나 공포 때문에 손절하지 못하고 오히려 무리하게 '물타기'를 했다가 더 큰 손실을 본 경험이 있으신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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