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국의 수도 런던을 떠올리면 빅벤, 타워 브리짓, 그리고 버킹엄 궁전이 먼저 생각납니다. 하지만 전 세계 외환 거래의 중심지이자 유럽 금융의 심장부인 '시티 오브 런던(City of London)'은 우리가 흔히 아는 런던(Greater London)과는 전혀 다른, 역사와 특권을 간직한 기이한 공간입니다.
내가 글로벌 금융 시장의 역사를 탐구하면서 가장 흥미로웠던 사실 중 하나는, 뉴욕 월스트리트와 더불어 세계 자본을 분배하는 이 거대한 금융 지구 안에 영국 국왕조차 허락 없이 함부로 들어갈 수 없는 독자적인 자치 구역이 존재한다는 점이었습니다.
단 1제곱마일(약 2.9㎢) 남짓한 작은 구역에 불과하지만, 2,000년 가까이 자본의 흐름과 특권을 지켜온 '시티 오브 런던'의 숨겨진 비하인드 스토리를 소개합니다.
[국왕도 함부로 못 들어가는 '도시 속의 도시']
시티 오브 런던은 행정구역상 800만 명 이상이 사는 거대 도시 런던(Greater London) 안에 위치한 독립된 자치구입니다. 약 1제곱마일 정도의 면적이라 흔히 'Square Mile(스퀘어 마일)'이라는 별칭으로 불립니다.
이곳의 역사는 로마 제국이 영국에 진출해 세운 '로마니움(Londinium)' 성벽 도시까지 올라갑니다. 1066년 정복왕 윌리엄이 영국의 왕이 되었을 때, 그는 상업 중심지였던 이 지역 상인들의 막대한 자금력과 독립성을 인정해 줄 수밖에 없었습니다.
이때 맺어진 약조를 시작으로 시티 오브 런던은 영국 왕실과 별개의 특권을 유지해 왔습니다. 지금도 국왕이 시티 오브 런던 영역에 들어가기 위해서는 성벽 경계선이었던 '템플 바(Temple Bar)'에서 시티의 수장인 '런던 시장(Lord Mayor of London)'에게 예의를 갖추고 승인을 받는 전통 의식을 거쳐야 합니다. (이 시장은 정치적 상징인 '런던 시장(Mayor of London)'과는 완전히 다른 금융 지구 전용 시장입니다.)
[기업이 투표권을 갖는 기이한 자치 시스템]
시티 오브 런던의 독특함은 독자적인 법률 및 선거 제도에서도 잘 드러납니다.
이곳의 거주 인구는 불과 8,000명 안팎에 불과하지만, 매일 출근하는 금융업 종사자는 50만 명이 넘습니다. 그렇다 보니 민주주의의 기본 원칙인 '1인 1표' 외에 '기업 투표제(Business Vote)'라는 희귀한 제도가 운용됩니다.
시티 안에 본사나 지사를 둔 투자은행, 로펌, 회계법인 등 법인들이 임직원 수에 비례하여 표를 할당받아 시티 자치정부(City of London Corporation)의 의원과 시장을 선출합니다. 즉, 자본과 기업이 직접 지방 정부의 법을 만들고 행정력을 행사하는 구조입니다.
수백 년간 이어져 온 이러한 특권과 자치권 덕분에, 시티 오브 런던은 글로벌 금융사들에게 그 어느 곳보다 친기업적이고 세제 혜택이 유리하며 규제가 완화된 '금융의 성지'로 자리 잡을 수 있었습니다.
[커피하우스에서 태어난 보험과 증권의 역사]
오늘날 전 세계 자본을 주무르는 수많은 금융 기구들이 이 작은 '스퀘어 마일' 안에서 태어났습니다.
17세기 후반, 시티 오브 런던의 '에드워드 로이드의 커피하우스(Lloyd's Coffee House)'는 해상 무역선에 대한 소식과 정보가 가장 빠르게 모이는 장소였습니다. 상인들과 선주들은 커피를 마시며 배의 침몰이나 해적 위험을 분산하는 계약을 체결했고, 이것이 세계 최대 해상 보험 조합인 '로이즈(Lloyd's of London)'의 출발점이 되었습니다.
비슷한 시기, 인근의 '조너선 커피하우스(Jonathan's Coffee House)'에서는 상인들이 모여 주식과 채권 시세를 종이에 적어 게시판에 붙이기 시작했는데, 이것이 훗날 런던증권거래소(LSE)의 시초가 되었습니다.
[역사와 첨단 금융이 공존하는 시티의 교훈]
시티 오브 런던을 거닐다 보면 중세 시대의 화려한 전통 의상을 입은 Guild(상인 조합) 의원들과, 현대적인 유리 마천루 빌딩 사이를 빠르게 뛰어다니는 펀드매니저들이 한 공간에 섞여 있는 기이한 장관을 보게 됩니다.
이곳이 2,000년 가까이 글로벌 금융의 중심지 지위를 놓치지 않은 비결은 '자본에 대한 철저한 신뢰와 자치적 전통의 보호'였습니다. 비록 시대착오적인 특혜라는 비판도 받지만, 정권이 바뀌어도 흔들리지 않는 법적 안정성과 금융 친화적 환경이 세계 자본을 끌어모으는 강력한 자석 역할을 한 것입니다.
투자자 입장에서 시티 오브 런던의 역사는 자본주의와 금융 제도가 단순히 정부의 통제로 만들어진 것이 아니라, 시장 참여자들의 필요와 전통을 바탕으로 발전해 왔음을 보여주는 살아있는 박물관입니다.
핵심 요약
'시티 오브 런던(Square Mile)'은 영국 런던 내부에 존재하는 독자적인 자치 구역으로, 영국 국왕도 허락 없이 들어갈 수 없는 역사적 특권을 유지하고 있습니다.
거주민뿐만 아니라 금융 기업들이 표를 행사하는 '기업 투표제'를 운용하며, 자본 친화적이고 독자적인 규제·행정 시스템을 유지합니다.
17세기 커피하우스 문화에서 출발한 로이즈 보험과 런던증권거래소 등 현대 금융의 핵심 기구들이 이곳에서 탄생했습니다.
다음 편 예고
다음 글에서는 레딧 서브레딧의 개미 투자자들이 월가의 거대 헤지펀드를 상대로 전대미문의 숏스퀴즈 승리를 거둔 ‘게임스탑(GME) 사태: 서브레딧 개미들이 월가 헤지펀드를 뒤흔든 순간’을 다룹니다.
함께 생각해볼 댓글 질문
기업이 직접 지방 정부의 투표권을 갖는 '시티 오브 런던'의 방식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시나요? 금융 산업 발전을 위한 지혜로운 전통일까요, 아니면 과도한 특혜일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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